Shang-Chi and the Legend of the Ten Rings, 샹치와 텐 링즈 리뷰 (오마주, 웬우, 텐 링즈)

 

영화 리뷰







 솔직히 저는 이 영화를 볼 생각이 없었습니다. 뮬란 때 워낙 데인 기억이 있어서 "또 아시아 배경 MCU 영화겠지" 싶었거든요. 그냥 친구한테 끌려서 당일에 예매해 들어갔는데, 나오면서 제가 틀렸다는 걸 인정해야 했습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 생각보다 훨씬 잘 만든 영화였습니다.

영화 곳곳에 숨어있는 오마주

처음 버스 격투 장면에서 샹치가 재킷을 이용해 상대를 제압하는 장면을 보고 "어, 이거 홍콩 영화에서 본 것 같은데?" 싶었습니다. 제 감이 맞았습니다. 성룡의 홍번구에서 재킷을 무기처럼 활용하던 그 액션을 오마주한 장면이었습니다. 마카오 불법 투기장 씬에서 대나무 비계(飛階, 건설 현장에서 사용하는 임시 발판 구조물) 위를 오가며 펼치는 화려한 액션은 러시아워 2의 그 유명한 대나무 비계 시퀀스를 떠올리게 하는데,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MCU 스타일로 재해석했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웬우와 잉난이 대나무 숲에서 맞붙는 장면은 와호장룡(臥虎藏龍)의 대나무 숲 결투 장면을 오마주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와호장룡은 무협 영화에서 경공(輕功, 공중을 걷듯 가볍게 이동하는 무술 기예)을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작품 중 하나인데, 샹치도 그 감성을 꽤 충실하게 재현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터널 안에서 샹치가 혼자 다수의 적과 맞서는 장면, 이건 롱테이크(Long Take, 편집 없이 카메라를 끊지 않고 길게 찍는 촬영 기법)로 처리되는데 영화 올드보이의 그 유명한 복도 씬을 직접적으로 오마주한 것이라고 합니다.

감독이 "농담 아니고 진짜"라고 밝힌 오마주도 있습니다. 샹치가 텐 링즈로 에너지를 모아 구 형태를 만드는 장면은 드래곤볼의 에네르기파(에너지파)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외에도 영화 속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성룡의 홍번구 - 재킷을 활용한 격투 액션
  2. 성룡의 러시아워 2 - 대나무 비계 위 액션 시퀀스
  3.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 - 대나무 숲 결투 장면
  4.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 - 롱테이크 복도 격투
  5. 주성치의 쿵푸허슬 - 텐 링즈 액션의 핵심 영감. 영화 속 포스터로까지 등장

쿵푸허슬은 특히 영화 속 포스터 소품으로 직접 등장할 만큼 감독이 각별하게 생각한 레퍼런스입니다. 그리고 마카오 투기장 씬에서 어보미네이션과 맞붙는 선수로 깜짝 등장하는 웡을 보면서 저도 꽤 반가웠는데, MCU 팬이라면 이 씬에서 블랙 위도우에 나왔던 레드룸 출신 위도우와 아이언맨 3에서 등장한 익스트리미스(Extremis, 인간의 DNA를 재설계해 능력을 부여하는 기술) 강화 인간이 싸우는 장면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웬우라는 캐릭터가 이 영화를 살렸다

솔직히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웬우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영화를 보면서 가장 감정이 흔들렸던 장면이 샹치나 케이티가 아니라 웬우의 회상 장면이었으니까요. 잔인하고 무자비한 빌런인데 이상하게 밉지가 않았습니다. 방법이 완전히 잘못됐고 결국 파멸로 이어지지만,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한 명의 아버지라는 설정이 너무 먹먹하게 다가왔습니다.

원작 코믹스에서 텐 링즈(Ten Rings)를 사용하는 캐릭터는 만다린이고, 샹치의 아버지는 푸 만추라는 전혀 다른 인물입니다. 마블이 이 두 캐릭터의 설정을 합쳐 새로운 인물 웬우를 만들어낸 것인데, 그 결과가 꽤 성공적이었습니다. 놀라운 건 이 캐릭터의 입체성 상당 부분이 양조위 본인의 공이라는 점입니다. 마블이 양조위에게 원작에 얽매이지 말고 스스로 해석해서 만들어도 된다는 권한을 부여했고, 양조위는 웬우를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모르는 서툰 아버지"로 해석했습니다. 그 해석 하나가 영화 전체의 감정선을 바꿔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텐 링즈의 색깔 변화도 보면 볼수록 영리한 연출입니다. 웬우가 링을 사용할 때는 번개가 치는 듯한 불안정한 푸른 빛을 띠고, 샹치가 사용할 때는 은은하게 일렁이는 붉은 불꽃의 형태입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이건 단순한 색 구분이 아닙니다. 웬우는 죽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과거에 집착하면서 불안정한 파장을 보이는 반면, 샹치는 과거를 기억하되 거기에 갇히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에 안정된 빛을 냅니다. 같은 무기라도 사용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것이 된다는 메시지를 색채(色彩, 빛의 성질을 통해 감정과 의미를 전달하는 시각적 표현 요소)로 표현한 셈입니다.

참고로 웬우의 아내 잉리 역을 맡은 배우가 양조위와 감정 연기를 나눌 때 "남편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을 지었다"고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는데, 실제로 두 배우의 대나무 숲 장면을 보면 그 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걸 느낄 수 있습니다. MCU 속 연기 밀도가 가장 높은 장면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출처: IMDb - Shang-Chi and the Legend of the Ten Rings)

텐 링즈의 설정과 영화가 남긴 복선들

원작 코믹스에서 텐 링즈(Ten Rings)는 팔찌가 아니라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진 10개의 반지 형태입니다. 마블이 팔찌 형태로 바꾼 데는 이유가 있는데, 각각의 반지마다 고유한 능력을 가진다는 설정이 인피니티 스톤(Infinity Stones, 우주의 여섯 가지 핵심 에너지를 담은 보석으로 MCU 어벤져스 시리즈의 핵심 맥거핀)과 이미지 상으로 너무 겹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충분히 납득이 가는 이유입니다.

영화 초반에 있는 복선도 인상적입니다. 케이티 집에서 아침 식사 도중 할머니가 "거기는 죽은 남편 자리니까 비켜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샹치가 "과거에 너무 얽매이지 않으셨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이 대사가 사실 웬우의 이야기를 미리 암시하는 복선이었습니다. 죽은 아내의 목소리라고 믿으며 타로에 갇힌 존재를 풀어주려는 웬우 역시, 할머니처럼 과거에 붙들린 사람이었으니까요.

트레버 슬래터리 캐릭터도 이번에 꽤 활약합니다. 아이언맨 3에서 가짜 만다린으로 등장해 웃음을 줬던 그 인물인데, 이번엔 웬우의 포로 신세로 다시 등장합니다. 그의 방에 리버풀 머그컵과 목도리가 놓여 있는 건 아이언맨 3에서 그가 리버풀 팬임을 보여줬던 설정을 그대로 이어받은 디테일입니다. 이런 소소한 연속성이 MCU를 보는 재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쿠키 영상에서 샹치와 케이티, 웡이 노래방에서 부른 곡이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라는 것도 그냥 넘기기엔 아깝습니다. 밝은 멜로디와 달리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환멸을 담고 있는 노래인데, 희망을 품고 미국에 온 이민자 2세대인 샹치와 케이티의 이야기와 겹칩니다. 동시에 "환영한다"는 표면적 가사는 MCU에 새로 합류한 두 캐릭터를 향한 인사이기도 합니다. 이중적인 의미를 노래 한 곡으로 처리한 연출이 꽤 영리했습니다. (출처: Marvel 공식 - Shang-Chi 캐릭터 페이지)

샹치 역의 시무 리우는 이 영화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작품입니다. 마블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을 때 집에서 새우깡을 먹고 있었다는 일화가 있는데, 그 솔직한 반응이 오히려 이 배우를 더 친근하게 느끼게 해줬습니다. 또한 동양인이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면 왠지 부분 염색 브릿지를 하고 있다는 클리셰가 있는데, 마블도 처음에는 샤링에게 브릿지 염색을 시키려 했다고 합니다. 배우 장멍얼이 이를 거절한 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클리셰를 답습할 이유는 없으니까요.

자주 묻는 질문

Q. 샹치와 텐 링즈는 중국에서 왜 상영 금지가 됐나요?

A. 중국 정부는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인 히어로가 중국인을 구한다는 내용이 모욕적이라고 판단했습니다. 거기에 주연 배우 시무 리우와 양조위가 과거 중국을 비판하는 인터뷰를 한 이력이 있어 상영 허가를 내주지 않았습니다. 중국을 배경으로 한 중국인 히어로 영화가 정작 중국에서 상영 금지된 아이러니한 상황입니다.

Q. 텐 링즈가 원작 코믹스와 다른 이유가 있나요?

A. 원작에서 텐 링즈는 각기 다른 능력을 가진 10개의 반지입니다. 마블은 이 설정이 인피니티 스톤과 너무 이미지가 겹친다고 판단해 팔찌 형태로 변경했습니다. 또한 원작의 만다린과 푸 만추라는 두 캐릭터를 합쳐 웬우라는 새로운 인물을 만들어냈습니다.

Q. 샹치 터널 롱테이크 씬이 어떤 영화를 오마주한 건가요?

A. 박찬욱 감독의 올드보이(2003)에 나오는 복도 롱테이크 격투 씬을 오마주한 것입니다. 롱테이크란 카메라를 끊지 않고 편집 없이 길게 촬영하는 기법으로, 배우와 스태프 모두에게 높은 완성도를 요구합니다. 샹치의 터널 씬도 그 긴장감을 꽤 충실하게 재현했습니다.

Q. 웬우의 텐 링즈가 파란색이고 샹치의 텐 링즈가 붉은색인 이유가 있나요?

A. 단순한 색 구분이 아닙니다. 웬우는 죽은 아내에 집착하며 과거에 갇혀 있기 때문에 불안정한 파란 빛을 냅니다. 반면 샹치는 과거를 기억하지만 거기에 묶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이기 때문에 따뜻하고 안정된 붉은 불꽃의 형태를 띱니다. 같은 무기도 사용자의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진다는 영화의 메시지를 색채로 표현한 연출입니다.

Q. 마지막 쿠키 영상에서 부른 노래 '호텔 캘리포니아'에 숨겨진 의미가 있나요?

A. 있습니다.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는 밝은 멜로디와 달리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환멸과 좌절을 담고 있는 곡입니다. 희망을 품고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 가정 출신인 샹치와 케이티의 정체성과 맞닿아 있습니다. 동시에 "환영합니다"라는 표면적 가사는 MCU에 합류한 두 신규 캐릭터를 향한 인사이기도 해서, 이중 의미를 가진 선곡입니다.

샹치와 텐 링즈의 전설은 MCU 최초의 동양인 주인공 영화라는 타이틀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홍콩 액션 영화의 감성을 할리우드 규모로 잘 살려낸 작품입니다. 스토리 전개에 아쉬운 구석이 없진 않지만, 웬우라는 캐릭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볼 가치가 있는 영화입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오마주 장면들을 의식하며 한 번 더 보시는 것도 꽤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겁니다.

--- 참고: https://www.youtube.com/watch?v=_P8LaiePy8g